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암리 학살사건 (문단 편집) == 뒷이야기 == 해방되기 전까지 제암리 사건은 언급조차 못 되다가 1959년 4월이 되어서야 [[이승만]] 전 대통령의 친필로 된 순국 기념탑을 세울 수 있었다. || [[파일:제암교회(1969년).jpg|width=360px]] || [[파일:제암리3.1운동순국기념탑(1969년).jpg|width=360px]] || || 1969년 촬영된 제암교회 모습 (1938년 재건) || 제암리 3.1운동 순국 기념탑 모습 || 일본에서도 이 학살 사건은 거의 잊혀져 있었으나 1965년에 일본 [[개신교]]계 인사들에 의해 이 사건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. 당시 일본해외선교회 소속으로 한국을 방문한 오야마 레이지(尾山令仁) 목사가 유일한 생존자였던 전동례 할머니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. 큰 충격을 받은 오야마 목사는 귀국 후 '제암교회 소타(焼打)사건 속죄 위원회'를 조직하고 일본 개신교인들의 속죄헌금을 모금하여 교회당 재건 및 추모시설 건립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 왔다.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일부 유족들은 '일본인의 돈으로 교회를 지을 생각이 없다'며 완강히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aver?articleId=1968030200329207021|거부]]하는 등 논란이 계속되었다. 그러나 일본 교인들이 간곡히 거듭 속죄를 청해 왔고 [[예수]]의 속죄 사역이 [[기독교]] 교리의 핵심인 만큼 그 정신에 따라 속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점차 강해지면서 제암교회 측도 1968년 2월에 이를 수락하였다. 이에 일본에서 모금된 1,000만엔(당시 환율로 한화 약 800만원[* 이 무렵은 쌀 80㎏ 1가마가 5천원 남짓 하던 시절이었다.])을 토대로 사건 발생 50주기인 1969년 4월 15일에 교회와 유족회관의 기공식을 가졌으며 1970년 9월 22일에 사죄의 교회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aver?articleId=1970092200329207008|거행]]하였다. 이 교회는 하늘에서 보면 3자로 보이고 높이 12m의 종탑이 1자로 서 있어 3.1 정신을 상징하도록 설계되었다. 적어도 일본 [[개신교]]계에서는 반성과 사죄를 위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온 셈이다. || [[파일:제암교회(1973년).jpg|width=360px]] || [[파일:제암교회(1980년).jpg|width=360px]] || || 1973년에 촬영된 [[http://www.jeamch.com|제암교회]] 사죄의 교회당 || 1980년에 촬영된 뒷편 모습 || 하지만 이에 대해 여전히 불만을 가지고 있던 유족들도 있었고 1990년대 중반 중앙청(舊 [[조선총독부 청사]])을 철거하는 등 일제잔재 청산 및 복원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제암교회도 재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. 이에 따라 1997년에 문화재관리국 주도로 제암교회 복원 및 새로운 3.1운동 순국유적기념관 건축 사업이 [[https://n.news.naver.com/mnews/article/001/0004154405|추진]]되었다. 이 과정에서 일본 [[개신교]]계의 '사죄의 교회당'은 헐리게 되었으며 1만7천여㎡의 제암리 성역단지 내에 1,300여㎡ 규모의 새로운 순국기념관, 23인 순교묘지, 상징조형물 등이 조성되어 2001년 3월 1일에 완공되었다. 이 사건을 폭로한 스코필드 교수는 후에도 한국인을 돕다가 [[조선총독부]]에 의해 강제 출국당했지만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외국인으로써는 최초로 [[국립현충원]]에 안장되었다. 현재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[[http://www.jeamch.com|제암교회]]에서는 영상물과 교육자료 등을 통해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. 가끔 시간만 잘 맞추면 당시 생존자의 후손들도 종종 만나볼 수 있다. [[도쿄대학]] [[영문과]] 교수와 [[도쿄여자대학]] 학장으로 재직한 영문학자 사이토 이사무(斎藤勇, [[1887년]] [[2월 3일]] ~ [[1982년]] [[7월 4일]])는 자국 군인이 저지른 잔인함에 대한 비판과 처참하게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에게 조의를 담은 〈어떤 살육사건(或る殺戮事件)〉이라는 작품을 [[1919년]] [[5월 22일]] 《복음신보(福音新報)》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. || 일본어 || 한국어 번역 || ||それはトルコ領アルメニアの蛮行ではない。[br]300年前ピエドモントにあった殺戮ではない。[br]アジア大陸の東端に行なわれた惨事である。[br]永遠の平和を期する会議中の出来事である。 ||그것은 터키령 [[아르메니아인 대학살|아르메니아의 만행]]이 아니다.[br]300년 전 피에몬테에서 있었던 살육이 아니다.[* [[1655년]]에 [[이탈리아]] 북서부 [[피에몬테]] 지방에서 [[발도파]] 신자들이 대량 학살당한 사건.] [br]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행해진 참사다.[br][[파리 강화 회의|영원의 평화를 기약하는 회의]] 중의 사건이다.|| ||我らの愛する祖国においては、[br]人種差別を撤退すべしと、[br]いわゆる志士がいきまきどよめいた時、[br]五大列強の一と誇る君子国の方伯(つかさ)は、[br]その託された領土の民が結束して起ち、[br]君子国圧制を非とし、[br]一個の人として与えられるべき自由と権利を[br]要求するため示威運動を行なった時、[br]これ畢竟邪教の迷わすところと、[br]剣を按じて、布令をまわした、[br]某月某日某会堂に集まるべしと。 ||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에서는[br]인종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[br]소위 지사들이 떠들고 있을 때이다.[br]5대 열강의 하나인 [[일본 제국|군자국]]의 [[하세가와 요시미치|방백]](方伯)은[br]맡은바 영토의 백성(民)이 결속하여 일어나[br][[조선총독부|군자국 관헌]]의 압제를 주장하고[br]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를[br]요구하기 위해서 [[3.1 운동|시위 운동]]을 했을 때[br]필경 서양에서 온 종교가 미혹한 것이라고[br]검을 차고 포령(布令)을 돌렸다.[br]아무 달 아무 날 아무 교회당에 모이라고.|| ||そこは都を離れたさびしいひな里(ざと)、[br]木造りの粗末な魂のほこらが立っている。[br]白い着物をつけた土地の人々、[br]或る者は大病の老いたる父をはなれて、[br]或る者は産褥に入りし妻を残して、[br]或る者は辛くもその日を過すたづきをやめて、[br]今日(きょう)は日曜でもないのになぜ集まるのか。[br]お布令のためだ、いかめしい憲兵のためだ。[br]集まる者二十、三十。中には未信者もいた。[br]官憲は詰(なじ)った、「なぜ暴動に加わったか」と。[br]ああ己れの母国が滅びて不平なきを得ようか。 ||거기는 서울을 멀리 떠난 외딴 외딴 시골,[br]목조의 초라한 교회당이 서 있다.[br]하얀 옷을 입은 동네 사람들[br]어떤 이는 큰 병에 걸린 늙은 아버지를 떠나서,[br]어떤 이는 애기를 낳은 아내를 두고[br]어떤 이는 겨우 그날을 지낼 양식을 떠나서,[br]오늘은 일요일도 아닌데 왜 모이는가.[br]포령(布令) 때문이요, 엄격한 헌병 때문이요.[br]모인 자 이삼십, 그 중에는 [[예수|그리스도]]를 믿지 않은 자도 있었다.[br]관헌은 따졌다. 왜 폭동에 가담했는가고.[br]아아, 자기 모국이 멸망했는데 불평이 없을 수 있겠는가.|| ||しかも当局が善政をもって慕わせなければ、[br]誰が喜んで屈辱と侮蔑とを忍べよう。[br]しかももし、武断と暴力とを用いて、[br]民の慴(しょう)服をこれ計る為政者ありとすれば・・・。[br]信仰ある者は、官憲に対(むか)って[br]魂の自由を求めたかも知れない。[br]その言激越の調を帯びたとしても、[br]偶像礼拝をしいられる者に、[br]それはいけない、不柔順だと、[br]どうして我らは言えよう。 ||더욱이 당국자가 선정(善政)으로 따르게 하지 않으니[br]누가 기꺼이 굴욕과 모욕을 참겠는가.[br]더욱이 만일, 무기와 폭력을 사용하여,[br]백성의 복종을 꾀하는 위정자가 있다고 한다면…[br]그리스도인은 관헌에게[br][[개신교|신교]]의 자유를 요구했는지도 모른다.[br]그 말투가 격했더라도[br]우상 예배를 강요하는 자에게,[br]그것은 나쁘다, 불순종이라고[br]어찌 말할 수 있으리요.|| ||忽ち砲声、五発、十発・・・。[br]見るまに会堂は死骸(むくろ)の堂宇(ほこら)。[br]尚あきたらずして火をもって見舞う者があった。[br]赤い炎の舌は壁を嘗めたが、[br]官憲の毒手に撃たれた亡国の民を――[br]「西洋邪教」を信ずる者を――[br]憚る如く、恐るる如く、守る如く、[br]彼等の死骸(むくろ)を焼き払わない。[br]それと見て、風上の民家にも火をつけた[br]燃える、燃える。四十軒の部落は、[br]一軒も焼き尽くされざるはない。[br]君は茅屋の焼跡に立って、[br]まだいぶり立つ臭気が鼻につかないか。[br]乳呑み児をだいたままの若い母親、[br]逃げまどうて倒れた年よりなどの[br]黒焦げになった惨状が見えないか。[br]何、「ヘロデの子殺しよりもひどくない」というのか。[br]「ピエドモントやアルメニアのより人数が少ない」というのか。[br]「島原や長崎あたりの昔の事もあった」というのか。[br]「君子国にはそんな例が珍しくはない」というのか。[br] ||갑자기 총성이 한 발, 두 발…[br]순간 회당은 사체의 사당.[br]그것도 모자라서 불을 지르는 자가 있었다.[br]빨간 불길은 벽을 핥았으나,[br]관헌의 독수(毒手)에 넘어진 망국의 백성을[br]―서양 사교를 믿는 자를―[br]내외하듯, 두려워하듯, 지키는 듯,[br]그들의 사체는 불태우지 않는다.[br]그것을 보고 바람은 윗쪽의 민가에도 불을 붙였다.[br]탄다, 탄다, 사십 호의 부락은[br]하나도 남은 것이 없이 탔다.[br]초가집의 불탄 자리에 서서[br]아직도 스며오르는 취기(臭氣)가 코에 맡아지지 않는가.[br]젖먹이를 안은 채인 젊은 어머니,[br]도망가다 넘어진 늙은이 등의[br]까맣게 탄 참상(慘狀)이 보이지 않는가.[br]저, [[헤로데 대왕|헤로데]]의 [[헤로데 대왕#s-5|어린이 살해]]보다 비참하지 않다고 말하는가.[br]피에몬테나 아르메니아보다 인원수가 적다고 말하는가.[br][[시마바라의 난|시마바라]](島原)나 [[나가사키]](長崎) 등지의 옛날 일도 있었다고 하는가.[br]군자국에서는 그런 예가 드문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.|| ||もしこれをも恥とすることなければ、[br]呪われたるかな、東海の君子国。[br]或る新聞は簡単に伝えていう。[br]併合国土のキリスト教徒は、[br]群り集まって騒擾を起こし、[br]解散を命じた官憲にていこうしたため、[br]暴徒の死者二十、焼失家屋十数戸と。[br]また或る新聞は一言半句これを記(しる)さない、[br]さながら春風に吹き散る花を見るよう。 ||만일 이것도 수치로 삼지 않는다면,[br]저주받을진저, 동방 군자의 나라.[br]어떤 신문은 간단히 전해서 말한다.[br]병합 국토(倂合國土)의 기독교인은[br]모여서 소요를 일으키고[br]여기에 해산을 명령한 관헌에게 반항했으므로,[br]폭도 가운데 사자(死者) 이십, 소실 가옥 십수 호라고.[br]또 어느 신문은 일언반구 이것을 쓰지도 않는다.[br]마치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을 보듯이.|| 斎藤勇. "어떤 殺戮事件." ''한일 [[그리스도교]] 관계사자료'' (小川圭治·지명관 편 / 김윤옥·손규태 공역, 한국신학연구소), 1990년, [[https://koreanchristianity.tistory.com/20|#]] ya022978. "斎藤勇「或る殺戮事件」全文." ''http://d.hatena.ne.jp'', 2011년 04월 17일, [[http://d.hatena.ne.jp/ya022978/20110417/1303000826|원문]], [[http://news.kukinews.com/news/article.html?no=2453|의역이 가미된 한국어 번역본]] 1980년대에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을 담은 영상이 있다. [[http://samil-100.kbs.co.kr/news/d/records/index.php|#]] 2019년 2월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제암리를 찾아 사죄했다. [[https://www.yna.co.kr/view/AKR20190227087100061?input=1195m|제암리 찾은 日기독교계 17인 제암교회서 사죄의 눈물]] 1971년에 제암리 학살사건을 다룬 영화가 촬영됐다. 제목은 '두렁바위'다. [[https://www.yna.co.kr/view/AKR20090224083600061|일제 제암리 학살사건 영화로 만들어“첫선”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